top of page

영영

@naki0712

If  They're Alive,

* 단델리온, 테오도르 그리고 크리스티네가 살아있다는 세계를 가정하고 있습니다.

 

중부는 한창 비가 오는 철이다. 무거운 가죽 요를 어깨에 두른 마부는 바퀴가 빠지지 않을까 염려하며 조심히 마차를 운전한다. 마차 속의 사람은 베이지색 머리카락을 흰 끈으로 묶었고 남색 모자를 썼으며 코트 역시 남색이었다. 와인을 한 모금 머금고 있는데 갑자기 마차가 멈췄다. 우려하던 대로 마차 바퀴가 진흙에 빠진 것이다. 그녀는 잔을 차분히 바닥에 내려두고 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마차의 외벽이 두터워 몰랐는데 생각보다 밖이 서늘했다. 마부가 그녀에게 사과하였지만 그녀는 그를 격려해주었다.

 

“나이 먹어서 귀족 흉내나 내보려하는데, 안 어울리는 짓 하지 말라고 그러나 보네요.”

 

그녀는 그리 말한 후에 마부에게 말을 한 마리 풀어달라고 말했다. 마부가 마차를 몰던 말 중 가장 큰 말을 끌고 그녀 앞에 대령했다. 긴 다리를 뻗어 말에 걸치더니 순식간에 말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서 기다리세요. 황금 궁에 가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아닙니다, 주인님. 괜찮습니다. 마차가 더러워집니다.”

 

마부는 손사래를 친다. 그의 주인이 마음이 넓은 사람인 줄 알았지만, 진흙 묻은 발로 마차의 옥바닥을 오를 수 없었다. 주인이 말고삐를 조종하여 말을 자신이 가려는 방향으로 돌렸다.

 

“마차 정도야, 내 사람 하나가 고뿔에 걸리는 것보다 염려스럽겠습니까?”

 

크리스티네 백작은 그 말을 이르며 말을 어르고 원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

 

현 황제가 즉위 이후 그의 남동생은 서부 일부 지역을 하사받고 새로운 공작이 되었다. 비옥한 토지, 디펜니어와의 교류가 활발한 요충지이다. 아직 아이가 없는 황제이기에 귀족들은 그런 황제의 행동을 심하게 반대했었지만 그들의 걱정은 기우였고 남동생인 단델리온 골든레너드는 현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고 영지의 생활 역시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속국인 디펜니어와의 관계 역시 전보다 원활해진 것도 그의 인덕이다.

 

단델리온은 어린 시절 몸이 약한 탓에 체격이 남들보다 작았지만 성장한 모습은 남들 못 지 않았다. 그의 듀터, 테오도르 듀 디펜니어와 비슷한 체격으로 자랐고 인상은 어린 시절처럼 여전히 민들레와 같았다. 의외로 귀족, 준귀족 영애들에게 연서를 가장 많이 받는 황족이기도 하였다. 그것을 보고 율리시즈 영식은 이렇게 설명한다.

 

“폐하는 딱 봐도 너무 커요. 큰데다 눈썹도 짙고 눈매도 날카롭습니다. 물론 엄청 미남이시긴 하지만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고 날카로워 보이긴 하죠. 조금만 나이가 더 들면 더 늙어보이지도 않고 딱 좋겠지만 아직은 아니란 말입니다? 근데 단델리온님은 그런 사자들 사이에서 유일한 미소년이시지 않습니까? 그들과 대견해도 밀리지 않는 미남에다 전혀 다른 인상에 성정도 온화하시니 여성들은 거기에 더 끌리죠.”

 

율리시즈는 얘기를 하느라 마른 입술을 홍차로 적신다. 듣고 있던 당사자 둘은 그의 말에 희비가 교차한다. 단델리온은 양손으로 입을 가려 올라간 입꼬리를 최대한 숨기려 하지만 성격 상 될 리가 없다.

테오도르 역시 그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차를 마시려하는데 단델리온이 그의 왼 팔꿈치를 살며시 당겼고 테오도르는 익숙한 듯 테이블 아래에서 손바닥을 펼친다. 단델리온이 그 손바닥에 어느새 두꺼워진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형님께서 화나셨을까?]

 

테오도르가 손을 올리자 단델리온은 손을 낮추고 손바닥을 보였다.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델리온은 여전히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릴 뿐이었다. 율리시즈는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본다.

 

그 때, 궁인 한 명이 방으로 들어와 아뢰기를 청하였고 율리시즈의 심복이 다가가 귀를 기울이는데 그가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폐하와 공작 각하를 부르십니다.”

 

단델리온과 어느새 기분을 떨쳐내고 쿠키를 먹던 볼프강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황태후께서….”

 

그 말에 볼프강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단델리온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왔어?”

 

볼프강의 표정이 찡그려졌고 단델리온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분명 편지에는 저녁에 도착한다 했는데 아직 해가 쨍쨍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볼프강은 의자에서 일어났고 단델리온은 그보다 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오도르도 심복의 말을 이해하였기에 알고 있지만 단델리온은 어디 갈 때 테오도르에게 말하고 가는 걸 잊지 않았다. 테오도르와 눈을 맞추고 “금방 다녀올게.” 라고 말한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인다. 테이블의 사람이 두 명이나 나가버리자 전보다 티테이블이 비어보였다. 시즈는 새 홍차를 받으며 테오도르에게 미소 지었다.

 

“이리 왕자님과 담소를 나누는 것도 저는 좋습니다.”

 

테오도르는 쿠테타의 주축세력이었던 시즈를 존경하고 있다. 그렇지만 본인이 말을 하지 못하고 그 탓에 남에게 호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단델리온 이외 사람과는 단둘이 있을 때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에 대한 생각 밖에 못한다. 시즈의 심복이 테오도르에게 잉크와 펜, 종이를 가져와주었다.

 

*

 

크리스티네는 궁인들이 깔아준 카펫 위에 발을 내렸다. 말은 마굿간으로 데려갔고 크리스티네는 아들들이 있는 궁으로 향했다. 진짜 아들 볼프강과, 친아들은 아니지만 귀여워하는 단델리온이 그녀를 맞이하였다.

 

“왜 빨리 오나 했더니.. 마차는 어쩌고 말을 타고 온 거야?”

 

즉위 후에는 어머니께 존칭을 쓰는 것이 주변 눈치에 맞는 일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저 두 사람에게 심하게 그것들이 입에 맞지 않았다.

 

“바퀴가 땅에 박혀서 일단 두고 왔어. 숲으로 사람 하나만 보내다오. 마부가 아직 거기에 있거든.”

 

볼프강이 시종에게 사람을 시키는 동안 크리스티네는 단델리온에게 인사를 했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더 컸구나. 잘 지냈니?”

 

단델리온은 긴장하여 양 뺨이 붉어져서 우렁차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형인 볼프강도 존경할 점이 많은데 그것들의 모태인 크리스티네를 보고 존경하지 않을 리 없었다. 단지 곧은 허리와 당당한 눈빛에서 나오는 위엄은 서있기만 하는데도 느껴져서 기가 죽을 뿐이었다. 기가 죽는데도 존경스럽고 동시에 다정하면서 무서운 사람이다.

 

“궁에는 얼마나 머물 생각이니?”

“휴가여서, 그동안 머물 생각입니다.”

“휴가인데 궁이라니. 테오도르와 더 좋은 데 가지.”

“테오도, 아니 테오도르 왕자도 같이 왔습니다. 지금은 율리시즈 영식과 같이 있습니다.”

“율리시즈 경도 있어?”

“네. 어머니도 꼭 와주세요. 다들 뵙고 싶어 해요.”

“알겠다.”

 

황궁 안에서는 볼프강이 앞장서고 크리스티네와 단델리온이 뒤에서 나란히 걷는다. 크리스티네는 황태후이지만 황실 안방의 주인자리는 거부했다. 답답한 것은 질색이라며,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의 뒤를 이어 영지를 다스렸다. 그때 크리스티네에 대한 반감을 가진 원로신하들은 어찌나 반대를 했는지. 처음에는 황제에게 상소로 항의하였고 그것을 쳐내는 방식이었지만, 곧장 크리스티네는 그 원로대신들을 다 자신의 사택으로 보내라 요청했다. 그 이후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원로들이 그녀에게 더 쩔쩔 매더니 반대하는 사람이 눈에 띄게 없어졌다.

 

그리하여 황태후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낯선 그림이 이번 대 황제에서 펼쳐진다. 크리스티네는 황궁을 둘러보던 중 볼프강에게 물었다.

 

“재무대신은 잘 지내니?”

“쓸 만한 책사들이 들어와서 얼굴빛이 좀 더 나아.”

 

크리스티네는 단델리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는 테오도르와 어때?”

 

단델리온는 미소 띈 입술로 말한다.

 

“테오랑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러나 그 웃음에 지나칠 만큼 티끌도 부끄러움도 없었기 때문에 크리스티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전히 진전 없는가보네.’

 

크리스티네가 미소를 짓자 단델리온은 마냥 어머니의 미소가 좋은지 환하게 웃어보였다.

 

*

 

볼프강 형제가 크리스티네 앞에서 긴장을 하는 건, 그녀가 위엄 있기 때문도 맞지만 또 하나가 있다면 심심한 그녀의 대련 상대가 돼야했기 때문이다.

 

볼프강은 익숙하지만 단델리온은 무술이 서툴러 늘 쩔쩔 맨다. 힘 조절을 해줬지만 그녀는 여전히 엄격했기 때문이었다. 단델리온은 체력이 다 떨어지고 빈혈까지 올라와 훈련장 기둥에 기대앉았다. 관람하러 나온 테오도르는 지친 그를 염려하자 단델리온은 애써 웃어보였다. 테오도르가 묻는다.

 

[많이 어지러우십니까?]

 

단델리온은 입모양이 잘 보이도록 고개를 들었다. 곧 그새 어지러워져서 다시 고개를 푹 숙이자 테오도르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한다. 크리스티네는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이 정말 귀엽네.”

 

크리스티네에게 지적받고 있던 볼프강도 그 쪽을 돌아본다.

 

“테오도르가 보고 있으니까 더 열심히 하는 게 귀엽더라.”

 

크리스티네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지만 볼프강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열심히 했어?”

 

크리스티네는 헛웃음을 한번 뱉은 후에 그의 어깨를 뒤로 쭉 당겼다.

 

“자세 다시 잡자.”

 

어깨를 잡아준 후 검의 끝을 내려준다.

 

“넌 남들보다 크니까 칼을 내려서 휘둘러야해. 작은 사람은 다 피하겠다.”

 

막무가내로 배운 무술이라 남들보다 버릇이 심하다고 늘 지적받는다.

 

“그럴 때는 밑으로 파고들면 돼.”

 

볼프강의 말대꾸에 크리스티네는 더 잔소리 없이 대련용 목검을 집어 들었다. 다시 대련이 시작되었고 크리스티네는 키가 작은 사람이 찌를만한 위치에서 공격한다. 예측가능한 공격이기에 곧 잘 막아 냈지만 금세 볼프강의 검을 피한 크리스티네는 밑으로 파고들 틈도 없이 그의 다리를 잡아 당겨 넘어트렸다. 크리스티네의 종아리보다 몇 배는 두꺼운 그의 종아리 힘이 맥없이 풀렸다.

 

뒤로 넘어져 허리를 손으로 문지르는 볼프강을 내려다보는 크리스티네.

 

“알겠지?”

“…알겠어.”

 

세상에 크리스티네 만큼 반응속도가 빠른 사람이 드물다 반박하고 싶지만 더 당하기만 할 것 같아 입을 닫았다. 크리스티네는 볼프강에게 손을 내밀었고 볼프강은 그 손을 잡아 일어났다. 그리고 무심결에 단델리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것에 수혁이 있는 걸 보고 허리를 폈다. 수혁이 두 사람을 향해 바로 서고 예의를 차린다.

 

“신, 언제 왔어?”

 

머리와 등이 잔디로 엉망이면서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영락없는 개구쟁이 꼴이라 웃음이 나올 뻔했다. 볼프강이 금세 그 쪽으로 달려갔지만 크리스티네는 붙잡지 않았다.

 

“잠시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괜찮아.”

“괜찮으시다면 이리로 도망 오지 마시고, 다시 크리스티네 님께 돌아가세요.”

 

뒤에서 크리스티네가 웃었다. 수혁의 성격을 아는지라 곧장 이리로 다시 보낼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수혁과의 일에 한에서는 몇 번이고 거절당해도 저렇게 달려드는 것이 퍽 귀여웠다. 꼬리는 없는데 흔들리는 게 보일지경이다.

 

*

 

처음 신수혁을 만났을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 가여운 아이인줄은 알겠지만 세상에 이런 요물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볼프강의 성정은 불과 같아서, 초에 옮기면 다스릴 수 있지만 기름에 옮기면 걷잡을 수 없단 걸 누구보다 크리스티네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조그만 외국인 남자애가 그 짓을 벌였단 말이다.

 

저택에 불이 난 날, 크리스티네는 기적적으로 구출되었지만 몇 년 동안 일어나지도 못했다. 볼프강이 입궁했다는 걸 알기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도 알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볼프강의 성질머리 때문에 곧장 궁에서 쫓겨나거나 다음 대 황제 때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져, 그 즈음에는 만나러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가 되었다니. 볼프강에게 그런 과감한 싹수가 없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 싹을 키워낼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가 신수혁이었다.

 

볼프강이 강렬히 원하는 이 소년이 일단 나쁜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저런 볼프강을 감당할 그릇이 될까, 라는 생각이 수혁을 만날 때마다 머릿속을 맴돌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혁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볼프강과 수혁은 서로 없이는 못살다 못해 죽으려 했다. 그것을 알고 난 후에 크리스티네는 괜히 복잡하게 생각한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들의 관계가 단순하다는 걸 깨달았다. 다만 둘은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명명하고 못했다. 공부만 잘하는, 순진하다 못해 바보들이었다.

 

단델리온은 그 재수 없는 늙은이의 자식이라고 상상이 안 될 정도로 귀여웠다. 크리스티네에 대해 볼프강에게서 들었는지 크리스티네를 처음 봤을 때부터 눈빛이 상당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한동안 심란한 일만 있던 크리스티네에게 소동물과 같은 단델리온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아이였다. 그의 듀터 역시 다정한 청년이었다. 단델리온은 생각보다 머리가 좋아서 크리스티네가 한번 가르쳐 준 것은 잊지 않고 기억하는 아이였다. 자주 공부를 가르쳤고 건강을 위해 운동을 가르쳤다. 점점 건강해지는 그의 모습에 크리스티네 역시 제자 보듯 기뻤었다.

 

*

 

단델리온은 일단 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테오도르에게는 걱정하지 말라 일렀고 소파에 앉아있으니 상태는 나아졌다. 몸이 뻣뻣해서 검을 잡는 폼도 도저히 익숙하지 않는데, 그가 보고 있어 심하게 긴장했다. 또 엉거주춤하게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생각하면 수치스러워진다.

 

‘몇 년을 해도 형님 발끝에 미치질 못하네.’

 

볼프강의 즉위식 때, 귀빈으로 두 사람이 같이 참관했었다. 그 때 불의의 사고가 있었지만 형님은 정말 영웅처럼 사고를 마무리했었고 그 모습에 대해 한참동안 테오도르와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테오도르와 같이 누워 그의 손가락이 손바닥에 말을 적어주면 단델리온은 가슴이 조여오고 웃음이 나왔었다. 그래도 그 때 테오가 했던 말은 여전히 머릿속에 맴돈다.

 

[폐하께서는 정말 늠름하시고 검술에도 능하시더군요.]

 

대화의 주제 자체도 그것이었지만 수줍게 미소로 자신의 손바닥에 그리 적는 테오도르의 모습은 예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내일 어머니께 다시 봐달라고 부탁드려봐야지.’

 

단델리온은 팔을 하늘로 뻗고 관절을 풀어보았다. 지금은 다시 움직일 힘도 없었다.

 

그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부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살며시 문을 여는 사람은 테오도르 뿐이었다. 테오도르가 쟁반 위에 차가운 물과 잔을 가져왔다. 단델리온이 자세를 바로 잡고 자신이 앉은 소파 옆자리를 톡톡 친다.

 

테오도르가 그 옆에 앉고 무릎에 쟁반을 놓은 뒤 찬물을 잔에 담아 단델리온에게 건넸다. 찬물이지만 은은한 조향이 났다.

 

“고마워.”

 

단델리온은 테오와 있을 때, 괜히 그의 손바닥에도 자신이 할 말을 손가락으로 쓴다. 테오도르는 입모양으로 말을 알아듣지만 이건 그저 테오도르와 조금이라도 더 닿아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테오도르가 단델리온의 손을 살며시 감싼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테오도르가 그리 말했지만 그럼에도 내일 크리스티네를 다시 만날 생각을 철회하고 싶진 않았다. 형님을 멋있다 했던 그 모습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알았어.”

 

말로만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풀이 죽은 테오도르를 보고 예전에 그가 해주듯 이마에 입을 맞춰줬다. 테오도르가 이마의 촉감에 고개를 들었다. 손을 맞잡고 이마에만 가볍게 키스하던 것으로 예전에는 충분했지만 이제는 가끔 입을 맞출 때가 있다. 테오도르는 말을 못하니 안 하고, 단델리온도 별 말없이 하는 것이지만 둘은 눈을 맞출 때는 부끄러워했지만 어느새 서로 눈을 감고 입술을 겹쳤다. 이때는 심장도 기분 좋을 만큼 뛰고 행복해진다. 입술은 꽤 오래 붙이다가 떼면 서로 잠깐 어색해지지만 손은 놓지 않고 있다. 왜 입을 맞추는지 모르지만 둘 다 어느새 습관처럼 자주 그러하였다.

 

[기다리며 율리시즈 경과 담소를 나눴습니다. 정말 즐거웠습니다.]

 

테오도르가 아까보다 눈에 띄게 소심해진 손가락질로 손바닥에 적었다. 중간에 글씨를 고쳤다.

 

“그랬구나.”

 

다시 단델리온이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른다. 테오도르는 입이 조금 벌어지며 더운 숨을 내뱉었다. 황자님과 입을 맞추고 나면 꼭 그러해진다. 이러다 언젠가는 참지 못하고 그를 함부로 와락 안아버리는 결례를 범해버릴 것 같다. 그가 자꾸 자신을 속국의 왕자가 아닌 친구로 대해주며 가끔씩 지나치게 친근하게 대해주니, 그리 해도 될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마음 한 구석에 떠오른다. 황자보다 자기감정을 먼저 떠올리는 것이 튜터로서 불경한 줄 알면서도 테오도르는 방금도 [부끄러워요.]라고 전할 뻔했다.

 

더워진 뺨을 제 손등으로 식히는 테오도르에게 이번에는 단델리온은 찬물을 권한다.

 

*

 

율리시즈는 눈치도 빨라 크리스티네가 좋아하는 각종 온실 과일에 크림을 얹은 카나페를 준비해준다. 차를 고르는 안목도 훌륭했다. 자신이 많이 아는 분야는 아니지만 대신 관심 있는 친구가 생기면 이리 혀가 즐거워진다. 그녀는 그와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주변의 이야기를 한다.

 

최근에 투자할 만한 산업에 대한 이야기, 영지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동전이 흔들리는 이야기와 더불어 주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오늘만 궁에 머물고 내일은 북부로 갈 예정입니다.”

“북부에 정인이 계시다 하셨죠?”

“네 맞아요. 벌써 가슴이 떨립니다.”

 

율리시즈가 제 뺨을 양손으로 감싼다. 그를 만날 생각에 황홀한 모양이었다. 분명 율리시즈의 묘사에 따르면 볼프강과 판박인 외모에 머리색만 검다 했었다. 성격은 정반대로 순진하다 했다. 자주 듣지만 전혀 상상이 안 되는 모습이었다. 그를 포함에 북부에 관심이 없지 않은 크리스티네 였다.

 

“언제 한번 꼭 만나고 싶어지는 분이네요. 북부는 꼭 한번 가고 싶은 곳입니다. 시즈 경의 정인이 있다는 것도 흥미롭고, 폐황제의 사생아들이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듣고 또한 놀랐답니다. 그리고 또 만나보고 싶은 이가 있습니다.”

 

율리시즈가 손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닦으며 크리스티네를 돌아보았다.

 

“누구입니까?”

“아슬란 장군입니다.”

 

율리시즈는 순간 재미난 그림이 보이는 듯 하였다. 아슬란과 같은 입이 험한 사람과 청초하지만 강철 같은 크리스티네가 만나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상상이 되었다. 아마 조금이라도 기가 약한 사람은 두 사람 사이 대화에 끼지도 못할 것이다.

 

“볼프강에게 얘기 전해 들었을 때부터 계속 신경 쓰이더군요. 그 망나니의 아이들을 거두어 그 어떤 이도 접근 못하는 땅에 터를 잡은 사람이라. 같이 술 한 잔 기울이고 싶은 사람입니다.”

“입이 험하시지만 매우 호쾌한 장군님이니 분명 잘 맞으실 겁니다.”

“그러길 기원할 뿐입니다.”

“원하신다면 가실 때 보온복을 지원해드리고 싶습니다. 크리스티네 님.”

 

크리스티네가 이름으로 부르도록 허락하는 일은 거의 없다. 볼프강과 그의 절친들 뿐이다. 사실은 예전에 폐황제가 자신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를 때, 황제만 아니었다면 발로 차버렸을 것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기쁘게 받겠습니다. 시즈 경.”

 

*

 

볼프강은 밤에 양초 하나에 의지해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무섭기는커녕 익숙한 길이었다. 이 길에서 계단을 하나 내려가고 조금 더 걷는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 때. 평소 같으면 궁인이나 있을 길에 손님방에 있어야할 테오도르가 복도에 서있었다. 갈림길에서 가만히 있었다.

 

볼프강이 그의 앞에 손을 흔들어보였고 테오도르가 볼프강을 알아보자마자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를 한다.

 

“여긴 무슨 일이야?”

 

그러자 테오도르가 특별히 대답은 못하였다. 그가 말을 못해서가 아닌 그 어떤 표현도 망설여진다는 듯한 망설임이었다. 그 때 뒤에서 어떤 다른 촛불이 서서히 복도를 밝히며 다가오고 있었다.

 

“형님?”

 

잠옷차림에 담요를 걸친 단델리온이었다. 볼프강이 뒤를 돌자, 볼프강에 가려졌던 테오도르가 단델리온에게도 보였다.

 

“테오, 여기 있었구나.”

 

볼프강이 테오도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단델리온이랑 만나기로 한 거야?”

 

테오도르의 귀가 붉어졌고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더 숙인다. 괜찮다고 말해준 후 테오도르가 가는 것을 허락해주자 테오도르가 천천히 단델리온 쪽으로 움직였다. 단델리온은 자신에게 온 테오도르의 어깨에 따로 준비해온 담요를 걸쳐준다. 다시 테오도르와 함께 볼프강 쪽으로 향하도록 선 후 인사를 한다.

 

“안녕히 주무세요, 볼프강 형님.”

“어, 그래..”

 

테오도르와 단델리온이 멀어지고 볼프강도 본래 가려던 길로 향하였다. 볼프강은 가장 특별한 방의 문을 두들겼다. 안에서 수혁이 나온다. 볼프강이 안으로 들어가자 수혁이 문을 닫았고 볼프강은 그의 등을 안고 뒷목에 장난하듯 입을 맞췄다.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수혁이 나직하게 말했다. 볼프강은 목을 약하게 깨물다 핥으며 입술을 문질렀다.

 

“그래? 간만에 궁에 사람이 많아져서 그런가봐.”

“그렇군요.”

“그런데 오늘 이상한 거 봤어.”

 

그리 말하며 입술을 떼자 수혁이 뒤를 돌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볼프강이 방금 본 테오도르와 단델리온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테오도르는 아직 내가 어색한 가봐.”

“황제 폐하께 속국의 왕자가 어찌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건 그런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그럼 무엇인데?”

 

수혁은 상황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단델리온과 테오도르는 매우 긴밀한 관계이다. 소꿉친구이며 둘이 떨어지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하였다. 스킨십 또한 자주 목격된다. 물론 대부분 테오도르 왕자가 귀가 들리지 않아 손바닥에 글씨를 써주는 모습이지만, 그런 습관 때문인지 둘은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 되었다.

그리고 방금 볼프강의 말에서 보인 테오도르의 태도는 왕자로서의 태도보다 무언가를 숨기려는 모습이다. 테오도르는 본래 외국인으로 귀빈방의 사람이고 단델리온과 방이 다를 것이다. 지금 층에 황족인 단델리온의 침실이 있으니, 이것으로 보아 테오도르는 단델리온의 침실을 찾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단델리온 님께서 성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튜터로서 방에 들락거리는 것이 단델리온님께 폐가 끼칠까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세상에 입을 맞추고 같은 침대를 쓰는 튜터가 있는지는 모를 수혁의 판단이었다.

 

“그렇구나.”

 

볼프강도 몰라 쉽게 납득했다.

Ⓒ 2020. 영영 All rights reserved.

2020 KING'S MAKER COLLABORATION WITH YOU. THANK YOU ALL FOR YOUR PARTICIPATION.

bottom of page